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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가능한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까?

by 쓸모 & 쓰임새 2025.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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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80년대 말, 초코파이 광고 속 이 문장은 당시 한국 사회를 감싸고 있던 정서의 핵심을 간명하게 꿰뚫고 있었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 가 닿고, 표현보다 눈빛과 손길로 전해지는 감정. 그것이 곧 ‘정 (情)’이라 불리던 시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말은 아름답다. 오랜 연인의 눈빛, 가족의 침묵 속 위로, 오래된 친구의 짧은 인사.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이 닿을 때, 우리는 관계의 깊이를 실감한다. 말보다 더 큰 마음의 교류, 그것은 이상적이며 우리가 바라는 관계의 궁극적 형태다. 

 

그러나 그 문장은 이제, 어딘가 불편하다. 정말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까?

 

 

잔향

 

관찰과 돌봄의 힘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말투에서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고, 어떤 부모는 아이의 등굣길 뒷모습에서 낯선 불안을 읽어낸다. 오래된 친구는 침묵 속에서 오히려 진심을 포착한다. 하지만 그런 장면은 예외에 가깝다. 너무 많은 시간이 쌓였을 때, 너무 많은 시선을 건너왔을 때만 가능한 일. 말없이 통하는 마음은, 그저 ‘정’이라는 말로 포장되기엔 너무나도 섬세하고 귀한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는, 결국 말하지 않아서 어긋난다. 우리는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서 기대한다. 가족이라면, 친구라면, 연인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이 정도는 눈치채야지’, ‘그 말은 아니지만 그 마음쯤은 알잖아’. 하지만 그 기대는 조용한 방식으로 무너진다. 알지 못한 채 지나가고, 미처 묻지 못한 채 어긋난다. 결국 침묵은 오해가 되고, 오해는 거리감이 된다.

 

‘정’이라는 단어는 본디 다정하고 따뜻한 감정이지만, 그것이 표현되지 않을 때는 종종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가족인데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니?” “친한 사이에 그 말은 좀 서운하다.” 말하지 않는 것이 성숙이고, 참는 것이 사랑이라는 오래된 통념은 이제 다시 질문받아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이, 정이 아니라 미성숙한 기대는 아니었는지. 내가 전하고 싶은 마음을 누군가가 ‘알아주어야만’ 하는 감정 구조가, 과연 건강한 관계의 조건이었는지.

말한다는 것은 단지 정보를 나누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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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있는 용기, 말을 들어주는 용기

 

하지만 바로 그 아름다움이 때로 관계를 무너뜨리는 오해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을 때, 우리는 실망한다. “그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 안 해도 느껴야지.” 그런데 정말 그래야만 할까?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건, 사실 가장 성숙한 공감의 결과물이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세심하게 살피고, 끊임없이 마음을 기울여온 시간의 결과다. 마치 매일 다듬은 연습 끝에야 가능한 즉흥연주처럼. 아무런 돌봄이나 소통의 과정 없이도 상대가 내 마음을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관계에 대한 게으른 기대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개인은 점점 더 분화된다. 일하는 방식도, 사랑하는 방식도, 휴식하는 방식도 서로 다르다. 누구에게는 따뜻한 말이 위로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혼자 두는 시간이 배려일 수 있다.


그것은 감정을 드러낼 용기이며, 상처받을 준비를 갖춘 행위다. 그리고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고통이 내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주는 일이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는 아름답다. 그러나 말해도 괜찮은 관계는 더 깊다. 우리는 이제 다시 배워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라는 말 뒤에 숨겨진 불안과 기대를.

 

 

이런 세상에서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환상은 자주 깨진다. 우리는 실망하고, 관계는 틀어진다. 결국 중요한 건 말하는 용기다. “나는 지금 이런 마음이야”, “이럴 땐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명확한 언어는 상호 기대를 조율하고, 오해를 줄이며, 실망을 예방한다. 

 

정확히 말할수록, 상대는 나를 오해하지 않고 나 역시 상처받지 않는다. 요구와 기대를 말하는 일은 배려의 반대가 아니라, 관계를 지키려는 성숙한 노력이다.


그리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는 단단한 진실을. 정은 이제, 더 이상 침묵이 아니다. 정은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분위기’, ‘말했을 때 외면하지 않는 귀’, ‘말한 뒤에도 괜찮은 마음’이다. 광고 속 그 문장은 여전히 우리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말은 어쩌면 이것일지 모른다.

“말해줘서 고마워. 그 말 덕분에, 너의 마음을 알 수 있었어.”


 

건강한 관계를 위한 연습: Jazz 밴드의 즉흥 연주

 

관계

 

말하지 않아도 되기 위해, 우리는 말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진심으로 말하고, 서로를 향해 자주 마음을 내보일수록, 언젠가 말하지 않아도 아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은 침묵의 기술이 아니라, 축적된 돌봄의 결과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 정직하게 말하는 태도다. 말은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다. 그 다리가 단단할수록, 언젠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닿게 될 것이다.

 

능숙한 재즈 밴드는 즉흥 연주 -잼, 스켓, Improvisation-에 능하다. 누군가 시작하면 그 빈 공간을 알아서 채워 넣으며 또 다른 연주곡을 만들어 낸다. 그 비결은 '연습'이다. 우리는 대화나 관계를 연습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장 서툰 것이 바로 대화와 관계이다. 그러니 항상 가장 많은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것 또한 대화와 관계에서이다. 관찰하고 연습하고 다시 반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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