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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힘, 질문을 멈추면 생각을 멈춘다

by 쓸모 & 쓰임새 2025.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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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알면 오만해지고,

조금 더 알면 질문을 하게 되고,

거기서 조금 더 알게 되면 기도를 하게 된다.

인디아의 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라다크리슈난'의 말이다. 오만과 질문과 기도의 차이는 앎에 대한 간절함일 것이다. 자신은 (다) 안다고 자족하는 경우에는 배움을 멈추고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과시하려고 하나, 조금 더 알게 되면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질문 (質問)이라는 한자는 근본과 근원을 묻는 배움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이것이 질문의 힘이요, 이것을 질문력 (質問力)이라고 부른다. 한편 인간의 한계에 접하게 될 때에는 신에게 기도하는 간절함의 극단에 도달하게 된다. 

 

 

질문릐 힘, 질문을 멈추면 생각이 멈춘다

 

 

 인터넷에 떠도는 의미심장한 농담이 있다.

 

학사: 나는 무엇이든 다 안다.

석사: 난 아무것도 모른다,

박사: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말하면 다들 믿는다.

 

학사: 내가 뭘 아는지 알겠다

석사: 내가 뭘 모르는지 알겠다

박사: 내가 뭘 아는지 모르겠다

교수: 거짓말을 해도 다 믿는다.

 

우리는 왜 질문을 멈추게 되었을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선생님이 "이것의 답을 아는 사람?" 하면 "저요, 저요"라며 양손을 들고 흔들며 애처롭게 지명을 받기를 청했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가다 보면, 답을 하겠다는 학생도, 잡이 무엇인가를 묻는 학생들의 숫자는 사라져 간다. 답을 하겠다는 것은 정답을 말하여 칭찬을 받아보겠다는 즐거운 동기로 그러했는데, 질문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심리가 발동하는 것일까. 나만 모른다는 것을 천하에 공표하기가 창피해서일까? 수업 진행에 방해를 주기 싫어서일까? 아님 모두 알기 때문에 굳이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까.

 

한 교수님의 유학시절 일화이다. 유학 초기에 수업 참여 점수를 질문과 참여로 채점한다기에, 그는 수업 전날에 질문을 영작하여 준비하여,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누가 동일한 질문을 한 연후에 자신이 알아듣지 못하고 동일한 질문을 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질문을 멈추는 것은 생각을 멈추는 것

 

질문이 멈추는 순간, 생각도 멈춘다. 어떤 것을 ‘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대상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으며 질문을 멈추게 된다. 스스로 이해가 완성되었다는 착각에 지적 호기심은 사라지게 된다.

 

미국 조사에 의하면 3세부터 5세 사이 3년 동안 아이들은 약 4만 개의 질문을 한다고 한다. 그들의 질문은 변화하게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What? (저건 뭐야?), Why? (왜 그래?")에서 How? (어떻게 하면 돼?)로 변호한다고 한다. 아이의 질문의 변화는 바로 지적 수준의 발전 단계와도 유사하다. 뭘까? 왜 그럴까? 에서 어떻게 하면 될까?로 생각의 넓이와 깊이가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물을 이해하려는 아이들의 호기심이 아니던가.

 

질문의 힘

 

그랬던 아이들은 (특히 한국 아이들은) 왜?라는 질문에 "몰라도 돼" "크면 알게 돼" "쓸데없는 것 묻지 말고 공부나 해"라는 억박으로 질문을 원천봉쇄받는다. 알고 싶은데,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며, 알지 못해도 관계없는 것이며, 크면 알게 된다는 세월에 흐름에 맡기라는 말에 기가 죽는다. 기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하고 있다.

 

선생님이 질문을 던지면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본다. 손을 든 아이는 ‘너무 나서네’라는 시선을 받을까 걱정하고, 틀릴까 두려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질문하는 아이’는 곧 ‘모른다는 것을 드러낸 아이’가 된다.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 결과, 많은 아이들은 질문 대신 암기를 선택하고, 생각 대신 정답을 외운다. 그리고 자라서는 질문을 하지 않는 어른이 된다. 질문이 부끄러운 것이 되는 사회, 그곳엔 성장이 없다. 이러한 습성은 왜?라는 질문의 부재를 불러온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왜곡 (歪曲)이란 한자의 왜 자에 눈이 머물렀다. 아닐 부 (不)와 바를 정 (正)이 결합하여 비뚤어질 왜 (歪) 자가 된 것이다. 재미있게도 왜 (歪)는 Why? 의 왜? 와 동음어였다. 옳지 않음을 지적하고 묻는 왜? 의 부재를 낳은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질문하지 않는 아이가 어른이 되어 왜?"라는 질문이 사라진 사회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콜롬비아호 우주인

 

 

2003년, 미국의 콜롬비아 우주왕복선은 임무를 마치고 대기권으로 재진입하던 중 폭발했다. 원인은 단순했다. 이륙 당시 날아간 단열재 조각이 날개에 손상을 줬고, 그 손상이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뒤였다. NASA 내부에서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치명적인 문제는 아닐 것’이라는 가정 아래 별다른 질문이 제기되지 않았다. 누구도 결정적으로 묻지 않았다. “그 손상이 정말 무해한가?”라고.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직 안에 퍼진 이 확신은 질문의 문을 닫았고, 그 침묵은 결국 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NASA 사고 조사 위원회에 있었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사고의 원인을 묻기 위해 실험을 했다. 고무 실링이 저온에서 탄성을 잃는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보여준 것이다. 그는 말했다. “사실이 이론보다 우선한다.” 파인만은 언제나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질문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겨진' 시스템의 허점을 찔렀다. 그는 자주 “나는 모른다”라고 말했고, 그 태도가 진실에 가장 가까웠다. 이 비극은 "다 안다"라는 확신이 부른 것이었다.

 

 

질문은 겸손의 다른 얼굴

 

우리의 삶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다. 그것은 끝없는 질문 속에서 진정한 배움과 학습을 하며 끝없는 질문 속에서 자라날 수 있다. 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묻지 않으며, 묻지 않으면, 멈춘다.

 

질문은 부족함과 결핍의 용감하고 담대한 인정에서 나온다. 그 결핍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질문은 호기심으로, 호기심은 통찰로 발전한다. 결핍을 에너지로 바꾸는 것. 그것이 인간이 배움 앞에 설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자세다.

 

결핍은 결함이 아니라 동력이다. 우리는 간헐적으로 무언가를 안다고 믿지만 (믿고 싶지만), 그보다 더 자주 모른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그 ‘모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그것은 결핍이라는 형태로 내면에 남아 우리를 뒤흔든다. 그리고 그 결핍은 뜻밖의 에너지로 응축되어, 때로는 우리를 앞으로 밀어낸다. 그렇게 시작된 움직임은, 방향을 얻을 때 ‘질문’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단순한 궁금함이 아니라, 존재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아이들은 세상을 질문으로 배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질문이 줄어들고 입력장치는 고장이 난다. 오롯이 출력장치만 동작하게 된다. 질문은 겸손의 다른 얼굴이다. 아는 척 대신 묻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진짜 앎에 가까워지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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