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널리 알려진 표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짜 맞는 말일까요? 이 말은 문화유산 감상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던 기와, 문양, 비율, 문장 하나에도 이야기와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이 말은 절반만 진실입니다. 저는 이 말에 태클을 걸어 보려고 합니다. 거꾸로 "우리는 아는 만큼만 보게 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고 말입니다. 지식은 더 넓게 보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시야를 가리는 틀이 되기도 합니다.
아는 것이 시야를 넓히는가, 가두는가
한 번 배운 지식은 편안함을 쥽니다. 그 편안함이란 안주 (安住) 하게 만듭니다. 가령 어떤 조각상을 ‘헬레니즘 양식’이라고 배운 사람은 이후에도 그 조각을 단지 ‘헬레니즘의 특징’으로만 읽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조각 자체를 보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렌즈로만 재구성합니다 즉, 그가 본 것은 조각상의 본체가 아니라 머릿속에 이미 형상화되고 괘념화 된 들을 보고 듣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식의 ‘보는 행위’는 진짜 보는 것이라기보다, 아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농담같지 않은 농담이 있습니다.
학사: 나는 무엇이든 다 안다. 석사: 난 아무것도 모른다, 박사: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말하면 다들 믿는다.
학사: 내가 뭘 아는지 알겠다. 석사: 내가 뭘 모르는지 않겠다., 박사: 내가 뭘 아는지 모르겠다. 교수: 서짓말을 해도 다 믿는다.
"조금 알면 오만해지고, 조금 더 알면 질문을 하게 되고, 거기서 조금 더 알게 되면 기도를 하게 된다."가는 말도 있다.
학사의 지식 수준에서는 무엇이든 안다, 그리고 뭘 아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배움의 깊이와 넓이가 커진 이들은 점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좌절하게 된다. 조금씩 알아갈수록 배움의 크기와 넓이에 경이하며 그 그 심정을 신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진짜 보는 힘은 ‘삼찰(三察)’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종종 ‘보는 것’이 단순한 시각 정보의 수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보는 힘은 세 단계의 사유, 곧 관찰(觀察), 통찰(洞察), 성찰(省察)**에서 나옵니다.
- 관찰은 외부 대상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서 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통찰은 그 이면을 꿰뚫어 보는 능력입니다. 보이는 것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어내야 합니다.
- 성찰은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되묻는 과정입니다. 보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입니다.
이 삼찰의 과정이야말로 ‘보는 행위’의 완성입니다. 그저 많이 안다고 해서, 혹은 오래 봤다고 해서 진정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관찰하고, 통찰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이 됩니다.
무지는 결핍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은 한때 진리처럼 통했지만, 오늘날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진짜 앎을 향한 동력입니다.”
지적 호기심은 자신이 모른다는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무지를 인정하는 순간, 질문이 생기고, 질문은 학습을 이끌어냅니다.
지식은 답을 주지만, 앎은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멈추고, 모른다고 인정하는 순간 나아갑니다.
그 용기, 무지를 직시할 수 있는 태도야말로 지혜의 시작입니다.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낯선 것 앞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둡니다.
하지만 성장과 확장은 언제나 낯섦에서 비롯됩니다.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낯섦을 디폴트로 받아들이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을 위한 토양입니다.
문화재든 예술이든, 심지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이건 이런 거야”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 말은 종종 생각의 마침표이자, 이해의 종착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이 아니라, 보고 싶은 만큼 보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는 만큼만 본다’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 넓은 시선이 필요합니다. 보고 싶은 만큼 보입니다. 관찰, 통찰, 성찰을 통해 스스로 보고, 스스로 해석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모르는 것을 즐기고, 낯섦을 환영하며, 지식이 아닌 질문을 중심에 두는 태도.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보는 사람’이 아닌 ‘깨닫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