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나 태어남을 축복받는다. 작은 울음소리 하나에 세상이 들썩이고, 낯선 존재가 처음 숨을 쉬는 그 순간을 위해 많은 이들이 분주히 준비한다. 병원에서 소리를 내며 우는 데도 박수받는 유일한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산부인과다. 출생은 시작이자 선물이며, 환영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반대편에 놓인 죽음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죽음은 고요하고, 준비 없이예고 없이 맞이하게 된다. 침대 위에 누운 채 눈을 감고, 남겨진 이들은 오열하며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 순간에 주인공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남은 사람들만 그 부재를 수습한다. 부고는 늘 갑작스럽고, 장례는 관행처럼 반복된다. 검은 옷, 하얀 국화, 형식적인 절. 그것은 이별이라기보다 하나의 절차다.
배우 박정자는 이 익숙한 관성을 거슬렀다. 올해 여든셋, 그녀는 150명의 지인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자신이 직접 쓴 부고였다. 거기에는 장례식의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고, 이렇게 덧붙여졌다.
“꽃은 사오지 마세요. 대신 제가 좋아했던 말, 함께 웃었던 순간, 기억 하나씩만 들고 와주세요.”

그녀의 장례식은 해변에서 열렸다. 배우로서 마지막을 영화의 장면처럼 기록하고자 한 그녀의 뜻에 따라, 이 장례는 곧 영화의 마지막 촬영이기도 했다. 장례식을 무대로 삼아, 삶 전체를 한 편의 연극처럼 마무리한 것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결혼식에는 혼주가 있지만, 장례식에는 상주만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만큼은, 삶의 주인공이 끝까지 남아 있었다.
생전 장례식은 단지 ‘죽기 전에 장례를 미리 치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끝을 스스로 기획하고, 내가 사랑한 이들과 미리 작별하는 방식이다. 준비된 죽음의 의식이다. 어쩌면 삶을 책임지는 가장 성숙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눈물로 이별하는 대신, 웃음으로 기억되는 장례. 미처 전하지 못한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를 꺼내놓을 수 있는 자리. 그런 의미에서 생전 장례식은 죽음을 위한 의례이기보다는, 관계를 위한 의식이다. 세월과 시간을 거스르는 유일한 존재는 '기억'이다. 그 기억을 되새기고 서로 공유하고 새로운 기억을 가슴에 담고 망자를 보내기 위한 마음의 의식을 치르는 거다. 망자가 주인공이 되는 장례식을 기획하고 각본을 쓰고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닿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침묵으로 사라질 수도 있고, 박정자처럼 환한 햇살 아래에서 유쾌한 작별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장례는 더 이상 상실의 공간이 아니라 축복의 무대가 된다. 마지막 인사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자유이다.
한 사람의 삶이 끝나는 자리에 사람들이 모인다. 검은 정장 대신, 환한 셔츠와 반가운 인사로. 국화꽃 대신 “그때 참 좋았지”라는 말 한마디로. 장례식은 그렇게 기억의 향기로 채워진다. 무대의 마지막 장면처럼, 삶의 엔딩 크레딧은 주인공이 직접 내리는 것이다.
"내가 나였던 모든 날들에, 참 고마웠습니다."
그 한 문장이 우리의 부고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삶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