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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짓다> 손택수, 사라지고 소멸될 것을 짓는 뜨신 일

by 쓸모 & 쓰임새 2025.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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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짓다

짓는 것 중에 으뜸은 저녁이지
짓는 것으로야 집도 있고 문장도 있고 곡도 있겠지만
지으면 곧 사라지는 것이 저녁 아니겠나
사라질 것을 짓는 일이야말로 일생을 걸어볼 만한 사업이지
소멸을 짓는 일은 적어도 하늘의 일에 속하는 거니까
사람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매일같이 연습해 본다는 거니까
멸하는 것 가운데 뜨신 공깃밥을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 지상의 습관처럼 지극한 것도 없지
공깃밥이라는 말 좋지
무한을 식량으로
온 세상에 그득한 공기로 짓는 밥
저녁 짓는 일로 나는 내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네
짓는 걸 허물고 허물면서 짓는 저녁의 이름으로

<눈물이 움직인다> 창비

 

손택수 시인

 

 
눈물이 움직인다
전통 서정의 맥을 이어가면서 섬세한 감수성과 서정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수려한 작품세계를 펼쳐온 손택수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눈물이 움직인다』가 창비시선 519번으로 출간되었다. “개인적 삶이 품은 고통의 이력과 현 사회 욕망의 시스템을 시인 특유의 시적 성찰과 발견의 세계로 이끌어 승화한 놀라운 성채”라는 평을 받으며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한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문학동네 2022) 이후 3년 만의 신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담백하고
저자
손택수
출판
창비
출판일
2025.05.28

 

 

 

한국어에서 ‘짓다’는 실로 놀라운 단어다. 영어의 produce, manufacture처럼 사물을 만들어낸다는 뜻을 넘어, 이 단어는 삶의 행위 전체를 감싸는 정서적인 행위이다. 옷도 짓고, 밥도 짓고, 집도 짓는다. 농사도 짓고, 이름도 짓고, 약도 짓는다. 심지어 웃음도 짓고, 이야기도 짓는다. 이처럼 ‘짓다’는 물리적 생산을 넘어 정서와 의미, 공동체적 행위를 모두 품는다.

 

손택수 시인의 「저녁을 짓다」는 이 ‘짓는’다는 말의 문화적, 철학적 깊이를 통과하여, 그 너머에 있는 ‘소멸을 짓는 일’에까지 닿는다. 시인은 말한다. “지으면 곧 사라지는 것이 저녁 아니겠나 / 사라질 것을 짓는 일이야말로 일생을 걸어볼 만한 사업이지.” 저녁은 밥 짓는 시간이며, 하루의 마무리이고, 어김없이 사라지는 풍경이다. 짓자마자 소멸하는 이 행위에 ‘일생을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시인은, 짓는다는 행위를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윤리적 행위로, 더 나아가 존재론적 명제로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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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에서 ‘짓다’는 대상과 목적이 비어 있다. ‘밥을 짓는다’고 해도, 그 밥을 왜 짓는지, 누구를 위해 짓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밥이 ‘누군가를 위해’ 지어진다는 것을. 시인은 말한다. “멸하는 것 가운데 뜨신 공깃밥을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 이 지상의 습관처럼 지극한 것도 없지.” 이 구절에서 ‘지극하다’는 표현은 더할 수 없는 숭고함을 지닌다. 사라질 것을 짓고, 그것을 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행위야말로 인간적인 일, 어쩌면 하늘에 속한 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공깃밥이라는 말도 새삼스레 빛난다. “무한을 식량으로 / 온 세상에 그득한 공기로 짓는 밥”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매일같이 먹는 밥이 얼마나 초월적인 것인지 깨닫게 한다. ‘공기(空氣)’는 삶의 기본적 조건이며, 그 공기를 담아낸 것이 ‘공깃밥’이다. 그러니 밥 짓는 일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세상의 무형한 것들을 형태로, 의미로, 따뜻함으로 변환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가 아름다운 지점은, 소멸을 감내하고도 끝내 ‘짓는 일’을 택하는 사람들에 대한 헌사에 있다. 하루가 저무는 시간, 하루를 소모하고 나서 남은 힘으로 밥을 짓는 사람. 그것이 곧 어머니이며,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언덕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하느님이 너무 바빠서 사람 곁에 어머니를 대신 보냈다고. 시인은 그 어머니의 손을 빌려 ‘하늘의 일’을 지상에서 재현한다.

 

이 시에서 저녁은 단지 시간 개념이 아니다. 저녁은 삶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며,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간이고, 더 나아가 소멸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저녁 짓는 일로 나는 내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네 / 짓는 걸 허물고 허물면서 짓는 저녁의 이름으로.” 저녁 짓는 일로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고백은 곧 인생 전체를 짓는 일로 바라보겠다는 선언이다.

 

‘짓는다’는 행위는 어딘가에서 늘 허물어지고, 사라지고, 잊힌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그 ‘사라지는 것’을 위해 짓는 일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말한다. 시에서의 저녁은 그래서 따뜻하고, 쓸쓸하며, 동시에 성스럽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봉헌이며, 사라질 것을 지으면서도 남는 무언가를 믿는 행위다.

 

손택수 시인의 「저녁을 짓다」는 언어에 내재한 철학을 다시 깨우는 시다. 짓는다는 말 속에는 삶의 목적과 대상이 생략되어 있으나, 그 생략 속에 가장 귀한 가치들이 숨어 있다. 어머니, 기다림, 공깃밥, 저녁. 이 모든 단어가 ‘짓다’라는 말 속에서 만나 하나의 삶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매일같이 저녁을 짓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소멸을 짓는 저녁의 습관을 가진 존재들인지도. 시인이 남긴 말처럼, ‘짓는 걸 허물고 허물면서 짓는’ 하루를 반복하며, 우리는 삶을 조금씩 익혀간다.